인터넷에서 말도 안되는 역사 관련 헛소리가 퍼지는 흔한 광경(초스압) 작성일 2018-06-14 모스카토 | 조회 3886 |

자유게시판


출처 :  https://pgr21.com/pb/pb.php?id=recommend&no=2919


가타부타 할 것 없이 본론으로 들어가면, 우연히 '최영장군의 활약지도' 라는 자료(?)를 웹서핑 중에 보게 되었습니다.

내용은 이렇게 되더군요.

1.jpg


저기 써져 있는 내용을 일일히 다 풀어쓰면

1345년 왜구 3천 격파
1348년 왜구 7천명 격파
1350년 왜구 1만 격파
1351년 왜구 1만 격파
1354년 홍건적 6천 격파
1354년 홍건적 3만 격파
1354년 홍건적 7만 격파
1355년 홍건적 1만 격파
1355년 홍건적 5만 격파
1358년 여진족 2만 격파
1359년 홍건적 5만 격파
1360년 여진족 4천 격파
1360년 원나라 군사 6천 격파
1360년 원나라 군사 1만 5천 격파
1361년 원나라 군사 1만 격파
1361년 원나라 군사 2만 격파
1362년 원나라 군사 4만 격파
1362년 홍건적 20만 격파
1363년 원나라 군사 5만 격파
1364년 원나라 군사 1만 격파
1374년 목호 3만 격파
1375년 왜구 8천 격파
1376년 왜구 2만 격파
1378년 왜구 3만 격파
1380년 왜구 5천 격파

길기도 합니다.

그런데 고려사 최영전을 보면,


2.jpg




최영전 첫머리부터 나오는 내용이지만, 최영은 젊은 시절 양광도 도순문사 밑에서 왜구를 몇명 사로잡는 무용담으로 이름을 떨친 인물인데(그것도 대단한것), 실제로 출세가도를 달린건 조일신의 난을 진압할때 한몫하고 나서부터였고, 군사를 지휘하게 된 것은 1354년 원나라에 지원군으로 갔을 적부터입니다.


그렇게 되면 일단,


1345년 왜구 3천 격파
1348년 왜구 7천명 격파
1350년 왜구 1만 격파
1351년 왜구 1만 격파


이 이야기들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임을 순식간에 알 수 있으니 바로 제외.


1354년 홍건적 6천 격파
1354년 홍건적 3만 격파
1354년 홍건적 7만 격파
1355년 홍건적 1만 격파
1355년 홍건적 5만 격파
1358년 여진족 2만 격파
1359년 홍건적 5만 격파
1360년 여진족 4천 격파
1360년 원나라 군사 6천 격파
1360년 원나라 군사 1만 5천 격파
1361년 원나라 군사 1만 격파
1361년 원나라 군사 2만 격파
1362년 원나라 군사 4만 격파
1362년 홍건적 20만 격파
1363년 원나라 군사 5만 격파
1364년 원나라 군사 1만 격파
1374년 목호 3만 격파
1375년 왜구 8천 격파
1376년 왜구 2만 격파
1378년 왜구 3만 격파
1380년 왜구 5천 격파


이제 이렇게 남아 있네요.


그러면 다음을 봅시다. 저 글을 보면 최영이 공민왕의 눈에 띄기도 전부터 왜구 수만명을 떄려잡았다는, 저런 사람을 못 알아본 공민왕 장님설 이후에 나오는 내용은 홍건적을 수천에서 수만명씩 때려잡았다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런데 실제 고려사 최영전을 보면,


원나라의 승상 톡토[脫脫] 등을 따라서 고우(高郵)를 정벌하였다. 모두 스물여덟 번 전투를 벌여 성이 함락되려 할 즈음에 톡토[脫脫]가 참소를 당하여 전투가 중단되어버렸다. 다음해 회안로(淮安路)에서 적을 방어하면서 팔리장(八里莊)에서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다. 또한 사주(泗州)·화주(和州) 등지에서 적들이 8천여 척을 타고와 회안성(淮安城)을 포위하자 밤낮으로 힘써 싸워 격퇴시켰다. 적들이 다시 침범해 왔으나, 최영은 몇 번이나 창에 맞으면서도 분전해 적을 거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최영이 탈탈을 따라서 고우성에서 장사성과 싸웠고, 탈탈의 해임으로 전투가 중단되어버린 내용, 이후 귀국할때까지 싸운 이야기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화주 등지에서 8천척이 넘는 어마어마한 홍건적이 성을 포위하자 최영은 수차례 창에 맞으면서도 아득바득 싸워서 결국 성을 지켰다는 내용들입니다. 그리고 끝입니다.


창에 찔릴 정도로 분전하면서도 악전고투한 최영의 활약상은 대단하지만, 이 당시에는 탈탈의 해임 이후 상황히 극도로 악화되어 원나라가 홍건적을 막아내는 것만도 안간힘을 벌어야 했을 정도였으며, 1355년 차칸 테무르가 30만이 넘는 군대를 황하 이북으로 가는 입구엔 중모에서 격파하여 겨우 제국의 수명을 연장시켰던 상황입니다. 당연한 소리지만 최영이 무슨 홍건적 7만을 격파했다느니 하는 이야기도 허무맹랑 합니다.


1354년 홍건적 6천 격파
1354년 홍건적 3만 격파
1354년 홍건적 7만 격파
1355년 홍건적 1만 격파
1355년 홍건적 5만 격파


이것도 생략. 그러면 남은건


1358년 여진족 2만 격파
1359년 홍건적 5만 격파
1360년 여진족 4천 격파
1360년 원나라 군사 6천 격파
1360년 원나라 군사 1만 5천 격파
1361년 원나라 군사 1만 격파
1361년 원나라 군사 2만 격파
1362년 원나라 군사 4만 격파
1362년 홍건적 20만 격파
1363년 원나라 군사 5만 격파
1364년 원나라 군사 1만 격파
1374년 목호 3만 격파
1375년 왜구 8천 격파
1376년 왜구 2만 격파
1378년 왜구 3만 격파
1380년 왜구 5천 격파



그런데 어이없게도, 이렇게 죽죽죽 '최영이 수만명을 죽였다' 고 계속 써놓은 이 글에서 '실제 최영의 전과' 가 빠져 있습니다.


귀국한 후 인당(印璫)과 함께 압록강 서쪽의 팔참(八站)을 격파하였다. - 고려사 최영전


1356년 최영은 인당과 함께, 압록강 서쪽에 있는 팔참을 공격했습니다. 이는 고려를 지배한 원나라에 대한 저항 의지를 공민왕이 '무력' 으로 보여준 사례였는데, 어이없게도 저 글에는 이 전공이 보이지 않습니다.



여하간 그 다음에 보이는 것은 1358년 최영이 여진족 2만을 물리쳤다는 내용인데 이 이야기도 황당무계 합니다.



6년(1357), 서해(西海)·평양(平壤)·니성(泥城)·강계(江界)의 체복사(體覆使)로 나갔다. 이듬해 왜적의 병선 4백여 척이 오차포(吾叉浦)를 침구하자, 최영이 군사를 매복시켜 두었다가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 - 고려사 최영전


'체복사' 란 왜구의 침략이 극심하던 당시, 고려 조정에서 지방에 파견한 일종의 임시 감찰사 겸 사령관이었습니다. 왜구의 침입에 피해를 입은 지역의 민정을 다독이고 상황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정말로 급한 경우 지휘관도 되지만 일단 가장 핵심적인 일은 '감찰' 로, 하도 똥별들이 극심했던 당시 고려의 상황에서 지방의 장수들이 제대로 싸우는지 확인하는 엄무를 담당했습니다. 


 체복사를 했던 사람은 여러명이 있지만, 유명한 사람을 최영외에 달리 더 말한다고 하면 조선 개국 공신인 '조준' 이 이었습니다. 당시 조준이 체복사로서 감찰했던 곳은 경상도 지역이었는데, 조준 한 사람의 파견으로 경상도가 안정되었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건 (물론 수천이상의 대규로 올때도 빈번했지만)수십에서 수백단위로 치고 빠지던 왜구를 상대할때에나 통할 전법이지, 여진족 2만 군대가 몰려오는 상황에서 사람 하나 덜렁 보내놓고 막으라고 한다면 공민왕은 여몽전쟁 당시 최씨 정권 이상의 쓰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타부타 말할것도 없이 당시 최영은 당시에 왜구 막느라고 바빴습니다.


  또 다시 어이없게도 실제 최영의 전과는 빠져있는데, 1358년 최영은 황해도 오차포에 온 400여척의 왜구 함선을 상대해야만 했습니다. 당시 왜구가 사용하던 함선은 최대 탑승숫자가 30명~40명 가량이 되는 배들이었는데, 20명 가량만 타 있었다고 해도 8000명이 되며, 10명씩만 타 있었다고 해도 4000명이 됩니다. 엄청난 숫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당장 왜구의 최대 침략인 진포-황산대첩 때가 500척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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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차포는 바로 여기.



당시 최영은 복병 작전을 통해 왜구를 물리치는데 성공했습니다. 4000~8000명에 달할 정도의 왜구를 물리칠 정도라면, 정말로 대승리인데 기록상으로는 상당히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가볍게 생각하면 조선왕조에서 최영의 전과를 일부러 축소하려고 한다는 식으로 볼 수도 있지만, 지정학적인 연구 관점에서 '대규모 전투가 펼쳐질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당연히 엄청난 대규모 전투는 아니었을것' 이라는 평도 있는 홍산 전투가 엄청난 승리로 기록상 묘사되기도 하는것을 보면 굳이 최영의 전과를 축소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을듯 싶고, 아마도 '격파했다' 고 해도 적을 괴멸시킨 승리 이런것보다는 물러나게 했다던가, 혹은 400여척이라는 함선에 비해 적의 실제 전력은 그보다 덜했다거나 했을듯 싶습니다.


 당시 왜구는 실제 전력 이상의 함선을 가지고 다니며 허장성세를 부리는 경우도 있었기 떄문입니다. 심지어 나포한 고려군의 함선 수십척을 앞에 세우고 현혹시킨뒤 공격하는 술책을 쓰기도 했으니... 


 어쨌거나 크게 본다면 엄청난 대승리로 묘사할 수도 있는 이 오차포 전투도, 저 지도글에서는 생략되어 있습니다. 아니 대체 왜...


그 다음에 보이는 것이 1359년 홍건적 5만을 고려 북방에서 무찔렀다는 이야기 입니다. 일단 당시 최영이 홍건적과 싸운 것은 사실입니다. 고려사 최영전을 보면,



서북면 병마사(兵馬使)로 있으면서 홍건적이 서경(西京)으로 침입하자, 여러 장수들과 함께 생양역(生陽驛)·철화현(鐵和縣)·서경(西京)·함종현(咸從縣) 일대에서 싸워 크게 전공을 세웠다. - 고려사 최영전



다만 최영전의 기록을 보면 이 전투들은 1359년의 일이지만, 다른 사료를 보면 최영전에 묘사된 '생양역 전투' '철현 전투' '서경 전투' '함종 전투(이 전추는 1차 전투, 2차 전투가 있습니다)' 등은 1360년 1월 ~ 2월에 펼쳐진 전투입니다. 아마도 이 떄의 홍건적이 1359년 12월 경에 침입해와서 2월까지 고려군과 싸웠기 때문에, 최영이 처음 출진했을 1359년 겨울로 퉁쳐서 기록한듯...


○계묘. 형부상서(刑部尙書) 김진(金縉)과 환관[宦者] 김현(金玄)이 기병 수백 기(騎)를 거느리고 상원군(祥原郡)으로부터 사잇길을 따라 가서 서경(西京)에서 적을 공격하였는데, 적 300여 인을 만나서 죽기로 싸워서 1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 고려사절요 1360년 1월


갑진. 상장군(上將軍) 이방실(李芳實)이 철화(鐵化)에서 적을 만나 1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병오. 여러 군사가 생양역(生陽驛)에 이르렀는데 총 20,000명이었다. 이때 날씨가 추워서 병사들이 손과 발이 얼어서 트고 쓰러진 자들이 매우 많았다.적이 아군이 장차 진군하여 공격할 것을 알고 마침내 포로로 잡고 있던 의주(義州와 정주(靜州) 및 서경(西京) 사람들을 온갖 방법으로 죽이니, 시신이 쌓여서 언덕과 같았다. 정미. 아군이 진군하여 서경을 공격하였는데, 보병이 먼저 들어가다가 밟혀서 죽은 자가 1,000여 명이었으며, 적의 군사 가운데 죽은 자 또한 무려 수천 명이었으므로 적이 물러나서 용강(龍岡)과 함종(咸從)에 주둔하였다. - 고려사절요 1360년 1월


○2월 기미. 안우(安祐) 등이 함종(咸從)으로 진군하였으나, 적이 우리가 아직 진을 정비하지 못한 틈을 타서 돌격하였으므로, 우리 군사가 패하여 달아났다. 적이 정예 기병으로 그를 뒤따랐으나, 안우, 이방실(李芳實), 김어진(金於珍), 대장군(大將軍) 이순(李珣) 등이 군대의 뒤쪽에서 그들을 막으니 적이 다가오지 못하였다. 마침 동북면천호(東北面千戶) 정신계(丁臣桂)가 군사 1,000명을 거느리고 이르러서 적과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수십 명의 목을 베니, 적이 추격하다가 50리에 이르러 멈추었다. 우리 보병은 산에 올라서 〈죽음을〉 면하였으나, 그 죽임을 당하고 노략질을 당한 자도 1,000여 인이었다. - 고려사절요 1360년 2월


○임신. 우리 군대가 또 함종(咸從)에서 싸웠는데,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신부(辛富)와 장군(將軍) 이견(李堅)이 전투에서 사망하였다. 여러 군대가 힘써 싸워서 20,000명의 목을 베고 가짜 원수[僞元帥] 황지선(黃志善)을 사로잡으니, 적이 물러나서 증산현(甑山縣)을 지켰다 - 고려사절요 1360년 2월



이 전쟁에서 고려군이 이긴 전투도 있고 진 전투도 있습니다. 이기고도 큰 피해를 입은 전투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함종에서의 2차전에서 고려군이 대승을 거두고 적 2만명을 참살하면서 결국 적을 몰아낼 수 있게 됩니다. 이 기록등에서 최영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지만, 열전에서 '여러 장수들과 함께 싸워 큰 공을 세웠다' 라고 써진걸 보면 당시 최영의 위치가 최고 지휘관급은 아니었기 때문에(당시 최고 지휘관은 안우, 이방실, 이암, 이승경 등등) 크게 보는 기록에서 제대로 언급은 안되지만 그 안에서는 용맹하게 싸웠다는 걸 알수 있습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함종에서 고려군이 죽인 홍건적 숫자는 2만명입니다. 이것만으로도 대단한 규모입니다. 그러나 저 글에 나온 '홍건적 5만' 에는 못미칩니다.



○정묘. 홍두적(紅頭賊) 괴수 가짜 평장[僞平章] 모거경(毛居敬)의 무리가 40,000이라고 떠들면서 얼음을 밟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와서, 의주(義州)를 함락시키고 부사(副使) 주영세(朱永世)와 의주민 1,000여 인을 죽였으며, 정주(靜州)를 함락시키고 도지휘사(都指揮使) 김원봉(金元鳳)을 죽였으며, 마침내 인주(麟州)를 함락시켰다. - 고려사절요 1359년 12월



당시 홍건적을 이끌던 대장은 모거경이라는 인물입니다. 기록에서는 '모거경의 무리가 4만이라고 떠들었다' 고 나오는데, 즉 호왈 4만이라는 것으로 실제 규모는 4만도 안된다는 이야기 입니다. 2만명을 참살한 것만 해도 충분히 대승리인데 이걸 굳이 부풀릴 필요가 있을지... 이를 제외하고 나면 남는것은 이렇게 됩니다.


1360년 여진족 4천 격파
1360년 원나라 군사 6천 격파
1360년 원나라 군사 1만 5천 격파
1361년 원나라 군사 1만 격파
1361년 원나라 군사 2만 격파
1362년 원나라 군사 4만 격파
1362년 홍건적 20만 격파
1363년 원나라 군사 5만 격파
1364년 원나라 군사 1만 격파
1374년 목호 3만 격파
1375년 왜구 8천 격파
1376년 왜구 2만 격파
1378년 왜구 3만 격파
1380년 왜구 5천 격파



이 다음에는 여진족을 겨우(?) 4천명을 물리친 전투 외에는 1360년부터 1361년까지 원나라를 물리쳤다는 말이 쭈욱 나옵니다. 그럼 이 당시 최영의 행적에 대한 기록을 최영전에서 보겠습니다.



평양윤(平攘尹) 겸 서북면 순문사(西北面巡問使)가 되었는데 당시 전쟁의 여파로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자 진제장(賑濟場)을 여러 곳에 설치하여 양식과 종자를 지급해 농사를 장려하고 전사자의 유골을 매장해 주었다. - 고려사 최영전



1359년 12월 ~ 1360년 2월까지의 전투가 끝난 후 최영은 서북면 순문사로서 전쟁의 피해를 입은 병사를 위문하고 전쟁으로 황폐해진 지방의 농사를 독려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원나라 군사 6천, 1만 5천, 1만, 2만, 4만과 싸울 시간은 없었습니다. 



 이 당시 최영이 싸운다고 하면 상대는 원나라가 아니라 역시 홍건적이었을 겁니다. 홍건적은 1360년 2월에 물러난 이후 그 해에도 두어차례 다시 들어오곤 했으며, 1361년 중반 부터는 한층 더 강력한 대규모 군세를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그 이전에 1361년 말에 이르면 홍건적에 개경을 함락하고 공민왕이 피난을 가는 상황이었는데 무슨 정신으로 원나라 군사 4만과 싸울 정신이 있을지...



그것들을 싹 지우면 이제 이렇게 남습니다.



1362년 홍건적 20만 격파
1363년 원나라 군사 5만 격파
1364년 원나라 군사 1만 격파
1374년 목호 3만 격파
1375년 왜구 8천 격파
1376년 왜구 2만 격파
1378년 왜구 3만 격파
1380년 왜구 5천 격파



1362년 최영이 홍건적 20만을 물리친 전투에 참여한 것은 사실입니다. 해당 기록을 보면,


○갑자. 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황상(黃裳)·한방신(韓方信)·이여경(李餘慶)·김득배(金得培)·안우경(安遇慶)·이구수(李龜壽)·최영(崔瑩) 등이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동교(東郊) 천수사(天壽寺) 앞에 주둔하였다.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이 감독하여 진군하게 하여 여러 장수들이 나아가 경성을 포위하게 하고, 정세운은 물러나서 도솔원(兜率院)에 주둔하였다.


최영은 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개경을 수복한 공으로 일등공신이 되어 공신각에 초상이 안치되었으며 토지와 노비를 하사받고 부모와 처도 작위를 받았다. - 고려사 최영전



 
최영은 당시 총병관 정세운 지휘 아래 펼쳐지는 전투에서 장군 중 한 명으로 출진해서 개경을 수복하는데 성공합니다. 드디어 처음으로 제대로 맞는게 하나 나왔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뒤로 1363년 원나라 군사 5만을 물리쳤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가 나옵니다.



이게 얼마나 말도 안되는 소리인지는 고려사 공민왕 세가 12년(1363년)이나 고려사절요 1363년 기록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이해 공민왕은 2월에나 되서야 도성에 겨우 돌아왔고, 그 직후 흥왕사의 난이 있었으며, 당연히 그 이후에는 전후 처리및 난 처리로 바빴고, 왜구가 계속해서 몰려왔으며, 무엇보다 덕흥군이 고려의 왕위를 주장하며 불온한 분위기가 국경에서 감돌았습니다. 이 와중에 무슨 5만 병사랑 전투할 정신머리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1364년, 원나라 군사 1만명을 물리쳤다는 기록은 사실입니다. 드디어 맞는게 2개 나왔습니다. 이는 덕흥군의 침입인데, 1만명을 이끌고 온 덕흥군은 최종적으로는 20명도 남기지 못한채 궤멸적인 패배를 당하여 도주하게 됩니다. 여러 장수들이 참여한 전투였지만 최영은 수주 달천에서 펼쳐진 전투에서 중군을 이끈 군의 중심이었습니다.(당시 우익이 이성계)
 


1374년 최영이 목호의 난을 진압한 것은 맞습니다. 이 당시 목호들이 3천 기병을 동원할 정도로 세력이 강성했던 것 역시 맞습니다. 하지만 적의 숫자가 3만이나 되었다는 것은 전혀 출처를 알 수 없는 이야기 입니다. 그러면 남은게 이렇게 됩니다.


1362년 홍건적 20만 격파
1364년 원나라 군사 1만 격파
1375년 왜구 8천 격파
1376년 왜구 2만 격파
1378년 왜구 3만 격파
1380년 왜구 5천 격파



이 뒤로는 왜구를 물리친 이야기가 줄줄 이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최영은 1375년, 우왕이 즉위한 이후로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어 사실상 장수로서 일선에서는 '은퇴' 했습니다. 대신 직접 싸우기 보다는 일종의 총지휘관으로서 군무를 비롯한 여러 일을 우왕에 앞서 최종적으로 결정하고 의논하는 위치에 있었고, 실제 나이도 환갑에 이르렀기 때문에 왠만한 일이 아니고선 직접 나설 일이 없었습니다. 특히 멀리 출정해야 하는 원정은 더욱 그렇구요. 그 황산대첩 때 조차도 명성 높은 최영 대신 이성계가 나선 이유가 있습니다.



때문에 1375년 왜구와 싸웠다는 이야기는 볼 것도 없이 '그런 사실 없음' 입니다. 1376년, 왜구가 극성이자 최영이 우왕에게 '자원' 하여 우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전투에 나서 승리를 거둔 '홍산전투' 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홍산전투는 최영 본인이 스스로 '적의 숫자가 많지는 않았다' 고 말하며, 무엇보다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지리적 여건상, 대규모 부대가 밀집하기엔 어려운 곳이라 실제로도 큰 규모의 싸움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습니다. 당연한 소리지만, 아니라 홍산전투의 규모를 최대로 본다고 해도 2만이나 될리는 없습니다.



1378년, 해풍 전투는 수도 개경의 15km 안쪽으로 왜구가 침입하여 개경을 향해 진격해오던 특별 상황이라, 최영이 총대장으로서 군세를 이끌고 나가야만 했습니다. 이 전투는 지원군으로 나중에 도착한 이성계의 활약으로 승리했는데, 적의 숫자에 대한 언급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1380년에는 황산대첩이 있던 해였는데, 이 해에 최영은 여러 장수들과 함께 동서강을 방비하러 나오는것을 빼고는 일선 현장에 나선 적이 없습니다. 애시당초 병이 걸려 몸이 안 좋아서 멀리 떠날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이것저것 다 지우면 남는 것은 이렇게 됩니다.




1345년 왜구 3천 격파
1348년 왜구 7천명 격파
1350년 왜구 1만 격파
1351년 왜구 1만 격파
1354년 홍건적 6천 격파
1354년 홍건적 3만 격파
1354년 홍건적 7만 격파
1355년 홍건적 1만 격파
1355년 홍건적 5만 격파
1358년 여진족 2만 격파
1359년 홍건적 5만 격파
1360년 여진족 4천 격파
1360년 원나라 군사 6천 격파
1360년 원나라 군사 1만 5천 격파
1361년 원나라 군사 1만 격파
1361년 원나라 군사 2만 격파
1362년 원나라 군사 4만 격파
1362년 홍건적 20만 격파
1363년 원나라 군사 5만 격파
1364년 원나라 군사 1만 격파
1374년 목호 3만 격파
1375년 왜구 8천 격파
1376년 왜구 2만 격파
1378년 왜구 3만 격파
1380년 왜구 5천 격파







1362년 홍건적 20만 격파
1364년 원나라 군사 1만 격파






이렇게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로 채워넣기도 힘든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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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그냥 말도 안되는 걸 상상으로 채워서 올려놓으면 그냥 바로바로 퍼져서 너도나도 부화뇌동 하기 십상...






대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이런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써재끼는지 하도 궁금해서 좀 찾아보고 다녀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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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이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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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자체는 좀 다르지만 보니까 내용의 원전은 이거인것 같습니다. 


아니, 그런데 조무는 최영이 아니라 이성계가 격파한 원나라 군벌이고, 아합출로 말하자면 '이성계 부하' 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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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을 보는데 점입가경입니다. 


그럴듯하게 '고려사' 라고 원문 내용처럼 쓰면서 전라도병마사 휘하였던 '최영이 친병 100여기를 거느리고 앞장 서 왜구를 물리쳤으니' 등등 이야기 하고 있는데, 맨 위에 국역 고려사 첫부분을 올린걸 다시 보시면 알겠지만 '양광도 도문무사' 의 휘하였습니다.


그 이후로는 하나하나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로 그냥 소설이 난무하네요. 고우성 전투는 원나라 군관들이 계속 전투를 중지시켜서 고려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도 못했고, 무엇보다 일전에 그 전투 이후에 탈탈은 유배를 떠나 죽게 되면서 군사 지휘를 하지도 못하던 상황이었는데, 유배 가서 죽은 탈탈이 최영을 보고 "사람이 아니다, 귀신
이다!" 라고 감탄했다고 합니다. 아마 귀신은 최영 보다는 탈탈이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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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사' 의 내용은 또 뭡니까? 신원사의 '고려전' 부분에서는 기황후 관련 이야기만 있을 뿐이지 애당초 고려의 파견 이야기 자체를 다루지를 않았습니다. 최영의 신묘한 무력 따위를 그렇게 일일히 그렇게 써줬을리도 만무하구요.


압권은 최영이 '1355년 홍건적 명장 남옥을 쳐부셨다' 는 부분입니다. 남옥은 주원장의 부하였던 상우춘 아내의 동생으로, 상우춘의 추천으로 주원장의 장수가 된 인물입니다. 그런데 상우춘이 주원장의 부하가 된 게 1355년 4월이었고, 이때는 그냥 '졸병' 이었습니다. 그 후 강남으로 진출하는 와중에서 공을 세워 출세했는데, 이 무렵에는 본인도 막 주원장의 눈도장을 찍으며 출세하기 바쁜 상황이었는데 어느 세월에 남옥을 추천하며, 그 추천한 남옥이 2만명이나 단독으로 거느리고 있다는 것인지... 원순제에게 금장을 하사받고 돌아갔다는 부분에서는 뭐라 할 말이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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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는 그냥 막나갑니다. 최영이 '홍건적 선봉대장 한림아와 일기토를 벌여서 죽였다' 고 합니다. 


한림아는 홍건적 선봉대장이 아니라, 홍건군 총본산인 동계홍건군 용봉정권의 군주로, 중국에 있는 수백만 홍건군 가운데 명분상으로는 가장 높은 인물이었습니다. 당연히 일기토 따위를 한 적도 없고, 죽은 시기도 1359년이 아니며, 죽은 장소도 고려의 서경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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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아 : 야! 나 왜 죽여?!



그 이후에는 '살리타이' 가 고려민을 납치해 가자, 최영이 무찔렀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살리타이는 고려 시대 전쟁사에 조금만 관심 있으면 다들 아시겠지만, '여몽전쟁 당시 몽골군 대장' 이었습니다. 1232년 처인성 전투에서 죽었으니, 1360년에 살리타이가 나타났다고 하면 100년의 세월을 거쳐 진화한 다음 다시 부활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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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로강(독로성이 아니라) 만호 박의를 무찌른 전공이나, 원나라 군벌 조무(당연한 소리로 러시아까지 추격한 적 없음)를 물리친 전공은, 이성계의 전공입니다. 나하추를 무찌른 전공도 마찬가지구요. 아합출로 따지면, 아예 그냥 이성계 부하였습니다. 후배 전공도 자기걸로 뻇어먹는 나쁜 최영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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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8년 해풍 전투는.... 아니, 그런데 이제 보니까 이 양반 제 글도 베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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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있는 짤은 내가 그림판으로 조악하게 한땀씩 쓴걸 그대로 가져다 쓰고, '왜구는 수도인 개경에 타격을 가하려는 군사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었는데, 실현되었다면 홍건적에 이어 또 한번 고려 말기에 왕이 수도를 버리고 달아나는 사태이자, 해적때에 수도가 털리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 판이었는데, 더 심각한것은 그게 실현 직전까지 갔다' 는 문맥도 그냥 그대로 붙여넣기 했네요. 뭐 이런 상황이... 



여하간 이 해풍 전투는, 저도 전에 한번 글로 다룬 적이 있지만, 최영이 패퇴하던 상황에서 이성계가 이끄는 구원병이 극적으로 도착해 이긴 전투입니다. 그런데 저 사람은 최영이 구원병으로 와서 이긴것처럼 서술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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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정도로 뻔뻔하면 역으로 멘탈 본받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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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4년 중국 장쑤성 고우 전투 (스물 여덞번의 교전을 치뤄 성 함락을 눈앞에 뒀으나 원나라 사정으로 전투 중단)

1355년 회안로 방면 수비 (8,000명 척 가량의 적군을 상대로 수비)

1356년 압록강 서쪽 팔참을 원정

1358년 현 황해도 장연군에 병선 400여척으로 침입한 왜구를 격파

1359년 황해북도 - 평안남도 - 서경에 이르는 군사범위에서 홍건적 격파

1362년 개경 수복전 참가, 승리

1363년 흥왕사의 난 진압

1364년 덕흥군의 침입 격퇴 (적 1만 명 중 17명 빼고 전멸)

1374년 목호의 난 진압

1376년 홍산 전투 승리

1378년 해풍 전투 승리

1388년 개경 공성전에서 요동 원정군과 전투, 패배





실제 최영의 전과는 이 정도 입니다. 


실제로 한것만 따져도 대단한데 굳이 말도 안되는 소설까지 써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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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37)

  • 니는아닌거같지 2018.06.14 13:32:25

    말도안돼는 병신같은 헛소리로 국뽕빠는짓도 그만해야됨 일본이 조선시대때 이미 GDP,국력 조선 쌈싸먹을정도로 확 오른것도 사실인데 이런말 하면 일뽕 쓰레기로 몰리잖음 헬조선타령은 좆같이도 많이 하면서 다른한편에서는 씹구리 지어내면서 국뽕하려고하니 이게 무슨 모순일까

  • 아무거나상관없음 2018.06.14 13:40:20

    아니 내생각에 그건 국뽕이라기 보다는 보통 그런 얘기 하고 다니는 애들이 일본에 감정이입해서 악플달고 다니는 사회 루저 오타쿠새끼여서 그런거같음. 정상적인 학회에서 학자들이 그런내용 발표하면 아무도 뭐라 안하잖아

  • 뭘바씨발 2018.06.14 13:58:59

    마즘. 나도 쪽본이랑 일뽕 오타쿠 새끼들 싫어하는편인데 이미 인조-현종 때만해도 쪽본놈들 전세계 은 산출량 1/3을 담당하고 네덜란드랑 조선사이에서 중계무역으로 개씹이득 취하고 있을때 서인정권은 패전의 책임 회피하고 향명배금 이데올로기와 정권유지에만 몰두하다보니 외교감각도 십창나고 여기에다 17세기 전지구적 소빙기로 인한 기근과 재해의 피해를 더 크게 쳐맞고 호란 이후에 왕조가 한번 바뀌거나 소현세자가 왕위에 올랐어야 했는데 한국사에서 속터지는 부분 슬프다 쉬발

  • 아무거나상관없음 2018.06.14 14:04:12

    나는 솔직히 일본 발전은 메이지때가 하드캐리했다고 보고 에도시대는 약간 그거에 얹혀서 과대평가되는 감이 있다고 느낌. 일단 일본이 중계무역으로 많이 벌었단 것도 좀 의문이듬. 애초에 일본 자체가 네덜란드하고 무역을 그렇게 많이 하는건 아니었고 그냥 창구 하나정도만 열어놓은 느낌이었음. 중계무역할 상대는 조선하고 청밖에 없는데 조선은 양란 이후 경제력 망해가고 있었고 청은 일본과는 비교가 안되는 규모의 무역을 서양과 이미 하고 있었음. 조선도 서양물품은 청나라 통해서 들어온게 훨씬 많지. 청나라의 대 서양 무역은 대영제국의 경제력까지 휘청거리게 해서 아편을 팔지 않으면 회복이 안 될 정도였고 당연히 일본보다 씹넘사로 무역량도 많고 서양국가도 다 중국 시장 개방에 목매달았음. 일본이 펌핑된건 메이지때 정치개혁/군제개혁을 너무 효과적으로 잘해서지 에도시대 해외무역 이런건 좀 부차적 요소인듯

  • 번째인거같아 2018.06.14 18:00:33

    이말이 맞다.

  • 뭘바씨발 2018.06.15 00:35:44

    조선후기나 메이지유신까지 갈것도 없고 이미 조선중기만해도 격차가 너무 벌어졌다 이말임 ㅇㅇ 메이지유신 이후 격차는 너무커서 조선한텐 슬픈얘기고 그리고 조선과 네덜란드사이 중계무역으로 큰 이득 본건 내 뇌피셜은 아니고 kbs 방송에서 단대 사학과 교수가 한말인데 자세한 수치같은건 안나왔음. 메이지 유신이란것도 본래 근대화를 목표에 둔 철저히 계획적인 혁명이 아니었음에도 그런 결과를 낳았다는건 조선 중기와 대비대는 일본의 국제정세에 대한 감각이나 외래문물에 대한 수용태도가 근간을 이루어놨기 때문이고 메이지 유신이후의 결과들을 끌어낼수 있었다는거지. 이미 에도시대에도 네덜란드 의서를 번역할 정도로 난학이 발달했는데 에도시대 이런 움직임이 이후의 근대화에도 기여했고. 아주대에 과학사 연구한 교수는 아예 이 난학이 메이지 유신의 이념적토대라고 보기도 함. 넓게보면 메이지 유신이란 사건 하나가 일본을 캐리했다거나 에도시대의 요소들을 부차적으로만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듯

  • 아무거나상관없음 2018.06.15 00:51:04

    조선중기에 벌어진게 당연한게 조선은 중기에 임진왜란 병자호란 거치면서 거의 고려말 수준으로 생산력이 후퇴했는데 일본은 경제력 계속 축적했으니 벌어질 수밖에 없지. 중국에는 서양 의서뿐만 아니라 성경 수학 천문학 물리학 번역서가 넘쳐났음. 그리고 정작 일본은 외래문물 수입에 중국보다 훨씬 소극적이었다. 그런 적극적인 중국도 실패한게 군제개혁 정치개혁인데 그걸 성공한건 진짜 대단한거임

  • 드높은 천상물반도 2018.06.14 13:35:08

    내가 아는 최강은 고려소드마스터 척준경뿐이다

  • 평범한눈팅족 2018.06.14 13:46:38

    의외로 고려때 인간 흉기들은 많음... 척준경말고도 혼자 독고다이로 나서서 죽을때 까지 싸우던 양규라던가 몽골군 총사령관을 사살한 김윤휴라던가 (다시말하지만 총사령관임... 별이 최소 4개는 먹고 들어가고 몽골군에서도 거의 몇 안되는 사례라 충격이 큼) 무신정권기에는 힘자랑한답시고 주먹으로 벽에 구멍낸 사례도 있을 정도... 애초에 이성계도 고려 장수였고 아마 왕이 아녔다면 이순신 근처급의 대우였을지도 모르지... 말그대로 조선건국 전까진 그야말로 나라를 구한 영웅이었으니.., 뭔가 굵직한 전쟁들이 많다보니 그만큼 전설적인 인물들이 많이 나온듯함... 지금은 많이 잊혀졌지만...

  • 센티미터 2018.06.14 13:57:36

    무휼도 겁내 쎄지 않음?

  • 평범한눈팅족 2018.06.14 13:59:44

    뿌나랑 육룡에 나오는 그 무휼은 소설속 인물이고 내가 말한건 전부 고려사에 나오거나 실존인물들임..

  • 센티미터 2018.06.14 14:00:22

    척준경 라이벌 하나 있지 않음??

  • 평범한눈팅족 2018.06.14 14:04:13

    그건 잘 모르겠음...

  • FcTlis 2018.06.14 17:22:18

    척준경의 절친한 친우 왕자ㅈ..

  • 쮸만지고 2018.06.14 16:41:43

    ㅠㅠ 무사 무휼! 드라마로 배운 역사

  • 평범한눈팅족 2018.06.14 13:37:50

    국뽕도 싫고 일뽕도 싫다. 그냥 좀 사심빼고 객관적인 사실만 좀 말했으면 좋겠다.

  • 더리퍼 2018.06.14 13:42:07

    즐기시게 놔둬

  • 아무거나상관없음 2018.06.14 13:43:02

    굳이 역사뿐만 아니라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거의 모든 정보가 그렇지. 다만 역사는 글씨만 읽을 줄 알아도 누구나 끼어들 수 있으니까 더 개판되는거고 이과 계통 학문은 전문지식 없으면 입 잘 못 떼니까 그런거지. 근데 이 글 자체도 좀 의문이 있는데 일본 배 1척 탑승 인원을 20명 남짓으로 규정한건 좀 갸우뚱함. 고려사에 보면 아지발도 연합함대 인원 구성이나, 경인의 왜구때 배 한 척에 보병 기병 비율이 몇이었다 하는 기록까지 다 있음. 그 외에 고려사에 기록된 왜구 머리 노획 수만 따져도 함대수당 인원산정은 좀 갸우뚱해보임. 이런거 꼼꼼하게 안된게 아쉽네. 남의 오류를 지적하는 글에 정작 오류가 있으면 뭔가 다 믿기가 찜찜해지잖아

  • 모스카토 2018.06.14 13:47:15

    1358년 최영은 황해도 오차포에 온 400여척의 왜구 함선을 상대해야만 했습니다. 당시 왜구가 사용하던 함선은 최대 탑승숫자가 30명~40명 가량이 되는 배들이었는데, 20명 가량만 타 있었다고 해도 8000명이 되며, 10명씩만 타 있었다고 해도 4000명이 됩니다. 엄청난 숫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당장 왜구의 최대 침략인 진포-황산대첩 때가 500척이었으니.,.. 30~40명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 아무거나상관없음 2018.06.14 14:00:52

    20명 '남짓'이라고 한건 3-40명까지 포함한거임. 그 10,20명 더해도 충분히 적다고 생각해서. 왜군 전함 400척이 털고 간 고려측 함선이 300척임. 고려 함선 크기 생각했을 때 한 배에 30명씩 타서 이게 가능할까 싶음. 황산대첩 기록만 봐도 왜구가 아군 병력의 10배는 많았다고 하는데, 아지발도가 끌고온 500척에 병력 꽉꽉 차있었다고 해도 30명씩 잡으면 15000명임. 근데 이미 황산대첩 전에도 여러번 싸우면서 왜군이 병력 많이 소모했으니까 실제론 더 적었겠지. 그럼 고려군은 1500명이란 소린데 이건 말이 안됨. 그 직전 사근내역 전투에 참가한 고려군 원수만 9명인데 1500명이란건 말도 안됨

  • 모스카토 2018.06.14 14:17:25

    그건 조선에서 줄여서 그렇게 생각했다고 글쓴이가 적어놓음

  • 아무거나상관없음 2018.06.14 13:50:16

    하나 더 아쉬운건 레퍼런스를 거의 최영 열전에서만 가져왔다는 거.... 기전체 사서는 그 특징상 내용이 완전하지 않고 퍼즐처럼 나눠져 있는 경우도 많다. 자기 열전에는 참전 사실 안 나와있는데 다른 사서나 다른 사람 열전에서 참전 사실이 드러나는 게 흔한 일이기도 하고. 전체적인 맥락은 맞는 거 같은데 "최영 열전에 없으니 없는 사실이다!" 라고 말하기는 좀 민망하단거지. 당장 삼국지만 봐도 열전만으로는 그 사람 일대기 구성 못함. 그래서 온갖 사료들로 교차검증을 하는거

  • 모스카토 2018.06.14 14:18:13

    사료가 없어서 그런거겠지 그리고 저 사람은 일베충의 말도 안되는 거 증명하려고 최영열전만 가져온 걸 껄

  • 아무거나상관없음 2018.06.14 14:51:36

    없진 않음;; 그리고 맥락상 맞기는 한데 “열전에 없으니 존재 안한다!” 라고 보기엔 애매하단거임 다른 사료에 있을수도 있으니까. 연도의 모순을 지적한 건 훌륭함

  • 피빛여우 2018.06.14 13:44:54

    중국까지 건너가서 격퇴 ㅋㅋㅋㅋㅋㅋㅋㅋㅋ

  • 나무압빠 2018.06.14 13:51:34

    피지알러인갑네 반갑다 ㅎㅎㅎㅎ

  • God니콘 2018.06.14 14:05:28

    ㅈㄴ 길어서 3줄요약없으면 붐업줄라햇는데 있으니까 봐준다

  • 모스카토 2018.06.14 14:18:32

    감사 ㅋ

  • 면초가 2018.06.14 14:10:44

    ㅇㅂ는 그래도 아닌건 아니라고 논리적으로 반박이라도 하네 반성해라 개드리퍼야 자정좀 하자

  • 뉴뉴뉸뉴뉴뉸 2018.06.14 14:46:26

    저게 일베충들이 물고빠는 정보글인가...?

  • 은네모 2018.06.14 15:17:18

    캬 홍건적 선봉대장 소명왕 한림아ㅋㅋㅋㅋㅋㅋㅋㅋ

  • 조쪽에요쪽에 2018.06.14 15:36:03

    그래도 최영장군은 위대하시다

  • 민트초코포비아 2018.06.14 15:53:26

    사실 이글도 ppap였던거임

  • 번째인거같아 2018.06.14 18:04:15

    사실 역사적으로 갓대륙>>>>>>넘사벽||>>>>>>넘사벽||>>>>>>>좆본>=좆선 이었음.

  • 번째인거같아 2018.06.14 18:05:41

    인터넷에서 역사관련글 댓달기 좆같은게 중국을 위로두면 조선족되고 일본을 위로두면 일뽕씹덕후되고 조선을 위로두면 국뽕병신이 되버림.

  • 다롱찌 2018.06.14 21:59:10

    아니 그래서 최영이 몇킬이라는거야

  • alwjrqns 2018.06.14 23:28:49

    이것만 그런게 아니라 인터넷에 구라가 넘쳐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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